위험사회의 주민조직화Ⅱ - 사회복지기관과 주민조직화
이두진(장위종합사회복지관 관장)
호모사케르와 사회복지기관
조르조 아감벤의 책 <호모 사케르>는 '호모사케르'를 벌거벗은 생명, 신성한 생명이라는 이중의 의미로 설명합니다. ‘호모 사케르’는 로마제국에서 법적 테두리 바깥으로 추방된 자를 지칭하는데,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로마법은 잘 정비된 합리적인 법망으로서 토지를 소유한(슈미트) 시민권자의 권리를 옹호합니다. 호모 사케르는 그 권리를 박탈당한 ‘예외 상태’의 무소유적 존재입니다. 호모사케르는 ‘희생양’도 아닌 은폐된, 익명의 죽음, 즉 간단히 말해서 사회적 개죽음으로 내몰린 존재입니다.
국내에서는 용산 참사라든가 밀양 송전탑, 세월호 사건, 송파 세 모녀 등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야만이 극에 달할 때,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고유명사로 죽어간 이들이 이 개념으로 조명된 바 있습니다. 사회복지기관에게 ‘호모 사케르’는 어떤 존재인가요. 주민조직화에 있어 이들은 우선하여 고려되고 있을까요.
지역사회복지관의 실천방식
사회복지는 무엇을 위한 학문인지? 어떤 실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존의 경쟁 구조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인 주민에게 가급적 많은 자원 확보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복지기관의 가장 큰 역할인지? 만약 그런 방식의 실천이라면 그것만으로 현재의 지역사회와 주민의 문제가 해결 가능한 것인지? 만약 사회복지기관이 단순히 전달체계의 일환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넘쳐 나던 ‘마을’을 복원하는 일, 쉽게 말해 더불어 살게 돕는 마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 돕고 나눌 수 있도록 거드는 일을 주로 하는 곳이라면 지금의 실천방식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그러한 맥락에서 지역사회복지관의 주민조직화가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것인지?
요약하면 이러한 질문은 ‘사회복지기관의 주민조직화는 가능한 것인지. 가능한데 그런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주민조직화가 가능하냐는 질문은 사실 복지기관의 전달체계 포지셔닝에서 발생하는 한계에 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남구 포이동 화재, 뉴시스>
한 동네에서는 재개발로 인해 경제적 득을 보는 상황인데 그 옆 동네에서는 불이 나서 주거지가 없는 상태에서 철거에 저항해 싸우는 주민들이 있습니다. 사회복지기관의 지점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정서적, 가치적으로 보면 당연히 재개발 지역주민에게 복지기관의 지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민조직화를 통해 투쟁하는 주민을 조직하거나 또는 조직화된 주민의 투쟁을 돕는 것이 복지기관의 역할일까요? 또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한편 반대로 이것이 사회복지기관의 역할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자원을 좀 더 확보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중계, 제공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답하면 이러한 생각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러한 현실적인 딜레마가 생기는 이유는 외부적으로는 사회복지기관의 예산 지원방식과 이에 따른 전달체계의 구조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재화나 서비스가 즉 어떤 자원이, 문제가 발생한 지역사회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에게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다른 곳(국가, 기업, 자원봉사자, 독지가)으로부터 클라이언트(주민)에게 전달되는 관계-체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대등한 거래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렇기에 이런 관계를 매개하고 전달하는 사회복지사와 클라이언트(주민)의 관계도 일방적인 경향(예를 들어 공급자-수요자 성격의 프로그램화 된 접근)을 띠게 됩니다. 내부적으로는 복지관의 시스템, 소통방식(문화), 경영, 운동성의 상실 등이 전달체계 상의한 부품으로 역할 하도록 사회복지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문제가 전달체계 구조 개편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달체계는 자주 개편되지만, 사각지대는 늘 발생하고 있고 이 시대의 호모 사케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책이 호모 사케르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송파 세모녀'와 같은 사건과 현상은 은폐된 호모 사케르를 등장시킵니다. 소수를 살리고 다수를 희생시키는 사회에서 고유명사 같은 죽음에 대한 공감력이 높아지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더 이상 소수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 호모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적 공감입니다. 확인된 예외는 탈출구를 만드는 지점이 됩니다. '제의'를 위한 희생물이라는 호모사케르의 죽음이 전달체계 개편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상황에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시대는 오히려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경쟁과 효율의 문제는 사회복지 현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큰 문제는 경쟁의 폐해와 단절입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더욱 많은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 그것을 통해 효율성을 측정하고 서열을 결정해 예산을 차등 지원하는 잔여적 접근은 문제의 일부를 해결하지만, 더 큰 문제를 가져오게 합니다. 경쟁은 배제를 가져오고, 배제는 공동체를 만들기보다는 있던 공동체를 훼손하는 결과를 야기합니다. 마을공동체, 복지공동체 사업이 공모화되고, 정해진 절차와 행정 안에서 집행되면서 마을공동체와 사업은 묘한 공존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회복지기관의 주민조직화, 가능한 것인가?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떡볶이 노점상을 하고 있는 아저씨에 대한 사례입니다. 노점상 철거 문제는 빈곤층의 생계와 관련된 큰 문제입니다. 깨끗한 도시환경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아무런 대안 없이 철거의 대상이 되고 생계에 위협을 받는 “가장으로서 살고 싶은 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떡볶이 아저씨 - 저도 살고 싶습니다. (제목 클릭 시 이동)
지식 e 채널에서 방영된 떡볶이 아저씨 사례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례와 같은 질문입니다. 이런 경우 지역사회복지관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노점상을 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민조직화를 이뤄내고 투쟁에 같이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조금을 받는 기관의 입장에서 해당 지자체의 방침에 반하는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기업 등의 후원금을 받는 기관이 이러한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투쟁 중심, 반기업적 기관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후원의 중단 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기관 입장에서는 꺼려지는 일이 됩니다. 한편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특수한 경우고 사회복지기관은 이러한 특수한 경우보다는 일반적인 주민의 삶을 돕고 지원하는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역에서는 벗어난 일이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러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생존권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와 같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가치 공감에 기반한 사회적 연대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각자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 시스템에서 지역사회복지관의 포지셔닝으로 이러한 연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회적 가치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일이 지역사회(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점상 연대 등이나 이와 관련한 단체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할 때, 지역사회복지관의 포지셔닝을 고려하면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필요한 건 ‘틀’이 아니라 ‘상자’입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하니?”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부탁이야…….”
“상관없어.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그려달라는 게 아니야.
보아 뱀은 너무 위험하고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러워.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난 양이 필요해.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아니야! 이 양은 병들었잖아. 다른 양을 그려줘.”
“자, 봐봐. 이건 양이 아니라 염소라고. 뿔이 있잖아…….”
“이 양은 너무 늙었어.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양을 그려줘.”
“내가 원한 게 바로 이거야! 이 양은 풀을 많이 먹을까?”
“그건 왜?”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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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시복지재단 서울복지교육센터 공유복지플랫폼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양은 아주 작으니까.”
“그렇게 작지도 않은데 뭘……. 이런! 벌써 잠들었네…….”
이것이 어린 왕자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