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의 주민조직화Ⅰ
이두진(장위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위험사회의 주민 조직화에 대해 3회에 걸쳐 연재하려 합니다.
첫 번째 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두 번째 글은 ‘사회복지기관의 주민 조직화’
세 번째 글은 ‘의미 있는 타인, 연대의 시작’
본 글을 통해 사회복지기관(사회복지사)의 지역사회 조직화에 대한 가치, 실천,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열어보고 싶었습니다.
정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화두를 던지고 단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 현장에서도 성찰과 실천을 계속 이어나갈 얘기를 풀어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위험사회의 주민 조직화Ⅰ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요?
무한경쟁과 단절된 관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한 경쟁과 단절된 관계로 점철된 세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였습니다. 위험사회는 근대와 함께 후기 근대를 얘기하면서 나온 개념입니다. 인류는 농경사회에서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근대란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가 무너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위험사회의 징후에서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모든 것을 새롭게 돌아봐야 할 시점에 온 것입니다.
근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근대는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던 사회였습니다. 연공 서열과 졸업장에 의해 혜택을 받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핵가족이 늘고, 급속한 국민교육의 확장으로 공장형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노동과 교육의 동기는 기회, 균등이었습니다. 아마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경제 발전을 통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부의 총량 확대’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것이 근대의 삶입니다. 그러나 경쟁의 심화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시장의 확대는 단단했던 근대에 균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MZ세대가 갖는 공정에 대한 화두는 무너진 근대에 대한, 경쟁 외에 대안이 없는 무너진 근대의 극단상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등을 이야기하기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끝없이 펼쳐진 것이지요. 70년대 초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조한혜정 선생님의 얘기는 많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7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 가장 놀랐던 것이 동네에서 만난 꼬마 아이들의 표정입니다. 그렇게 외로워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요새 우리 아이들의 표정이 딱 그렇습니다.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의 일정 단계에서는 어디에서든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징후는 ‘관계의 단절’입니다. 이웃 관계, 또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 혈연관계인 부모-자식 관계조차 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장은 모든 인간관계를 단기적인 관계로 잘라버렸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호 호혜의 관계라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이제는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합니다. 자식을 유학 보내며 투자라 생각하고 회수할 꿈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지 않고 나타나는 듯합니다.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내몰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 한겨레시민포럼 ‘우리 안의 이명박, 우리 밖의 이명박’ 중에서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는 능력 좋은 사냥꾼일수록 겸손하고, 포획물을 모두 부족장에게 넘겨 공평히 배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인류는 공동체 모두가 잘살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지녔고, 재분배와 상호 호혜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이뤘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위험사회에서는 이러한 균형이 깨지고 단기적인 관계 속에서 굉장한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행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인간적 관계가 상업적으로 바뀐 사회는 참으로 끔찍합니다.
혹시 글을 읽는 분 중에서 학교 강의를 다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학교 강의가 아니더라도 실습지도 등을 오래 하셨던 수퍼바이저, 또는 오랜 기간 동안 동네에서 아이들을 지켜보신 분은 한번 생각해 보세요. 2000년대 전과 후의 아이들의 표정이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는지요?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대학생 70% 이상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고 합니다. 등록금 문제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매해 230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부모-자식 관계의 변화는 가정과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CCTV의 설치와 아동 성폭력 증가 역시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폭력의 결과입니다. 한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귀가 지도를 위해 50, 60대 남성 노인들을 선발하자 학부모들이 반발해 모두 할머니로 교체했다 합니다. 사람들이 노인조차 못 믿습니다.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입니다.
‘구별 짓기’와 ‘나도주의’
무한경쟁과 관계의 단절은 중산층과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양극화를 점차 심화시킵니다. 푸코가 얘기했던 사회가 소수를 죽여 다수를 살게 했다면, 지금의 사회는 소수를 살리고 다수를 죽이는 사회입니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을 사유재산과 자유시장주의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은 중산층과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각인 되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대부분은 경쟁에서 지는 경험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성공한 모습으로 자신을 이미지화하기 위하여 비교하고 구별 짓는 과소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상류층을 따라 하는 ‘나도주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경쟁사회라는 것은 끊임없이 승자와 패자를 구분 짓고, 승자만이 살아남는다고 강요합니다. 승자 아니면 지배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지요. 경쟁을 통해 주변의 관계는 가식적인 관계로 변하게 됩니다. 자아와 자존감이 파괴되고, 소통은 단절되고, 긍정적 역할도 돈 버는 역할에 비할 바가 못하게 됩니다.
몇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잔소리 메뉴판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요? 메뉴판의 변화는 식당이 바뀌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경쟁에 바빠지게 되면 타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됩니다. 관계를 통해서 얻는 존중, 사랑과 같은 공동체적 덕목은 외면당하게 됩니다. 또한 타인의 성공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있어 ‘넌 뭐냐“’라고 끊임없이 다그치게 합니다. 관계와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나를 위한 자아실현이 아니라, 타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인가 소비하는 삶이 되고 이로써 상대적 빈곤과 자존감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공감능력의 회복 : 유모차와 휠체어
공감이란 유모차를 끄는 아기의 엄마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삶을 느껴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모차를 끌기 전까지 몰랐던 높은 턱 투성이 길가와 움푹 패인 도로, 자동차 중심의 도보 제한성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공감 능력이 상실된 사회는 그 걱정이 유모차 안의 아기에게만 제한되었을 때 나타나며, 그 공감의 상실은 아이의 전 생애에 걸쳐 누적적으로 쌓여 아이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됩니다. 부모가 착각하는 것은 그 상실된 공감의 범주 안에 나는 제외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심리이고, 채워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의 공감은 교환가치, 투자가치가 우선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일시적, 제한적으로 겪는 상황을, 누군가는 전 생애를 거쳐 안고 갑니다. 공감 능력의 회복은 그 상황에 대한 문제 인식과 해결과제를 개인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갖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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