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옥수수재단 박이근정 사회복지사
‘산에 미치면 약도 없다.’ ‘매주 등산동호회에서 혹은 혼자서라도 산을 탈 만큼 산을 좋아한다.’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그 날 그 자리에 모인 우리에겐 상관없는 말들이었다. 집근처 동네 뒷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산다운 산을 타 본적 없는, 지리산의 높이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6월 6일 사회복지사들이 모여 지리산을 올랐다. 서울특별시사회복지사협회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지리산 종주팀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은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어설프기만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래서 가능했으리라.
연일 내리는 비로 종주가 무산되고 당일산행으로 변경. 산행 전날 서울대표 8명의 멤버는 서울협회 사무국에 모여 각자 비품을 챙기고 전라북도 남원으로 출발했다. 무모한 도전은 용감했다. 밤새 차타고 내려가 그 다음날 아침부터 산행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새벽 6시. 우리의 산행은 성삼재에서부터 시작됐다. 전남, 전북협회 선생님들을 만나 전남협회에서 준비한 아침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노고단을 향해 출발했다. 맑은 날씨와 지리산의 진초록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했다. 드디어 노고단 대피소 도착. 같이 등산하는 전남, 전북협회 선생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이게 지리산이구나! 최고봉 천왕봉은 해발 1915m. 종주 길이 25.5km. 경남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무려 3개도에 걸쳐있는 거대한 산. 지리산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걷고 또 걷고 숲풀을 헤치고 질척한 땅을 피하고 계속 산길을 걸었다. 점심때가 다가오는 지라, 가방 속 협회에서 준비해 나줘 준 햇반과 스팸 등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미 머릿속엔 점심 무렵 시원한 그늘 아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어 군데 버너에 올려진 삼겹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캔, 우리의 고기를 낚아채는 젓가락질은 그 어느 때보다 날렵한, 후에 지리산에서 삼겹살 먹어봤다는 자랑거리로 내 마음이 이미 점심을 먹기로 한 뱀사골 대피소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 행복한 상상은 신림복지관 강상준 과장님이 그 전날 우리를 위해 무거운 등짐에 삼겹살 네 근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무모한도전이었기 때문일까? 우리가 가려고 했던 뱀사골대피소는 공사 중으로 폐쇄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순간 고기를 못 먹는 다는 실망보다 점심을 못 먹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함께 산행을 하는 전남협회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로 전남에서 준비한 도시락에 우리의 스팸, 햄, 김치 등을 보태어 맛있는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특히 신림복지관 변종부 선생님이 준비한 매실주는 인기 폭발이었다. 점심을 먹고 한 참을 움직여 삼도봉에 도착했다. 원래는 비로봉까지 가고 싶어 하는 무리가 있었으나 곽경인 사무국장님의 그 다정다감한 교섭 작전에 다들 넘어가 삼도봉에서 하산하는 걸로 조정되었다. 삼도봉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가 만나는 봉우리이다. 삼도봉에서 내려다보는 지리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 지리산.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아 그 자리에 꿈쩍 않고 거대한 자태를 뽐내는 그 광경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1박을 계획한 전남협회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우리 팀은 뱀사골 대피소를 지나는 루트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시간만 무려 4시간. 계속되는 돌길에 무릎이 떨리고 어깨가 내려앉았다. 계곡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어느새 다 내려왔다고 해야 맞지만 정말 끝이 없는 하산 길 이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여러 차례 쉬기를 반복해서 결국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 땅을 밟았다. 역시 느낌이 이상하다. 빠른 속도로 미리 내려간 사무국장님의 차가 멀리서 보인다. 저녁 어스름 무렵 우리는 힘든 몸을 차에 싣고 주차장으로 와서 점심때 못 먹었던 고기를 꺼내 판을 벌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리를 펴고, 수박을 자르고, 찌개를 끓이고, 척척 고기를 구웠다. 역시 고기 굽는 속도가 모두의 빠른 젓가락질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처음 지리산 등반을 결정하고 무탈하게 돌아오길 고대하면서 땀 흘리는 고된 시간을 통해 나를 마주하고 그냥 어슴프레 사회복지현장에서 느꼈던 정체성의 혼란과 포지셔닝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 15km의 산행을 통해 나는 내가 아닌 너를 만났고, 그 너를 통해서 현장에서 더 배우고 경험할게 많은 사람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격려를 받았다.
이제 공부를 끝내고 현장에 발을 담근 사람, 오랜 기간 현장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사람, 복지관에서 또는 다른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한 무모한 지리산행은 거대한 자연 앞에, 다르지만 같은. 나를 뛰어넘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살아가는 동지애. 인생을 배우기에 충분한 시간 이었다.
한 초여름 저녁, 만신창이의 몸으로도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우리가 먹은 것은 결국 돼지고기 한 점이 아닌 인생 한 점인 셈이다.
*무모한도전 10명의 최강 맴버소개
(다정다감 리더십 서사협 곽경인 국장님, 삼겹살 네근 신림복지관 강상준 과장님, 매실주 한 통, 수박 한 통 신림복지관 변종부 선생님, 말없이 강한 장애인신문사 이지연 선생님, 스피드 걸음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김경화 팀장님, 국가대표 나눔평화재단 문인선 선생님, 친박연대 은평종합사회복지관 박근혜 선생님. 그 동생 국제옥수수재단 박이근정. 그리고 보너스, 잘생긴 남자 서사협 정종우 회장님과 미모의 최성숙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