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길을 잃고 있는 아동권리 보장
성태숙 시민위원회 위원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정책위원장)
인천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체벌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적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보육 현장이 얼마나 힘겨운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교사에게 맞고 바들바들 떠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도대체 그 동안 이 일을 왜 바로잡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지금은 가해자의 냉혹함에 시선이 집중되어 분노하기에 급급하지만 이 문제를 결코 그 안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된다.
결국 우리 사회의 척박한 아동 인권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특히 아동들의 권리 보장이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측면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이렇게 자극적인 학대 사건이 드러날 때에만 겨우 주목받는 우리 사회의 이 천박한 현실을 문제 삼지 않을 때 이런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반복될 뿐이다.
아이가 얼마나 맞았는지, 어떻게 잔인하게 다루어졌는지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데에만 수고를 기울인다면 특히 그렇다. 결국 정해진 수순대로 사법권과 정치권이 나서서 가해자에게 철퇴를 가하고, 또 그런 처벌이 마땅치 않다는 한편의 논란을 잠재우지도 못한 채,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예방적 위협이 될 만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겠다는 약속과 CCTV와 같은 통제 장치를 더욱 촘촘히 설치하는 것으로 사건은 미봉에 끝나고 말 것이다. 마치 결말이 정해진 공포 영화를 보듯 우리 사회는 이 안타까운 현실에 한 순간 정신을 쏙 뺏겼다 금방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오로지 피해자와 그 가족들만이 다시는 이런 일상으로도 복귀하지 못하는 불행을 짊어지게 될 뿐이고, 환경의 근본적 개선 없이 더욱 공고해진 처벌과 감시 시스템은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의 시대가 분명한 명분을 따라 모두의 합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할 뿐이다.
사실 이런 사건을 두고 근엄하게 아동의 권리가 어쩌고 하는 것조차 계면쩍은 짓이다. 애나 어른들이나 모두가 대충 살고 대충 대접받는 이런 시대에 권리란 엄청난 말로 이런 현상을 설명해도 될까 주저되기조차 한다. 그래서 모두가 현실적인 보육의 문제로 좁혀서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보육 현장의 어려움을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고, CCTV가 결국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용감하게 지적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보육교사들은 조심스럽지만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자신들의 처우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또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당하며 위축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보호자들을 위시한 전체 사회는 이번 기회를 살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뭔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싶은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사람은 감출 것도 없지 않겠냐는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보육 교사들은 힘겹게 문제의 공을 다시 사회로 던져보려 하지만, 사회는 제대로 된 공론의 장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서운 기세로 공격적으로 공을 보육교사들에게 되던지고 말 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어디에서도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의 공포를 전하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도대체 우리 시대에서 아이들은 어떤 삶과 어떤 수준의 돌봄을 받고 싶은지 그리고 그를 위해 국가와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돌봄과 교육과 사회화의 대상으로만 아동들을 여기지 않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제대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사회 운영에 참여시키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과연 아동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까? 사실 소수자의 참여는 당사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다. 직접 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우리의 적극적 노력 역시 소수자들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아동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정치적 소수자들이다.
아동들이 이번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일차적으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부모가 가정에서 적절히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환경을 국가와 사회가 제공하는 문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국민의 기초적 삶의 질을 보장한다면 그 안에서 특정 연령의 국민들은 비단 소득이나 의료, 교육이나 주거 등의 보장뿐 아니라, 생활보장의 핵심으로 아동은 특히 보호자의 적절한 보살핌을 분명히 받을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그 사회적 여건 조성을 위해 의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지금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 아동 보육현장의 학대 사건의 향방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보육현장의 문제와 보육교사들의 낮은 질과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국가의 잘못 운운하며, 국가에 더 많은 관리감독권을 부여하는 것만으로 사태가 매듭을 지을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국가가 어린 국민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진정 무엇을 소홀히 하고 있는지를 짚어보는 질이 다른 사회를 위한 담론이 형성될 것인지 지금 막 그 갈림길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은 맡겨져서 자라야 하는가? 아동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왜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없는가? 왜 우리들은 질이 제각각인 보육 시설과 돌봄 시설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 왜 우리들의 교사들은 행복하게 우리들을 돌볼 수 없는가?
이런 아동들의 질문에 우리는 답을 해야 한다. 아동들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학대를 하지 않으면 권리가 보장되는 것인가? 더 많은 보육시설과 질 좋은 보육시설을 갖추고 국공립을 확대하는 것에서 그쳐도 되는가? CCTV를 달아놓고 보육교사들이 부모들의 아바타처럼 느끼도록 해도 괜찮은가? 그런 체제에서 아이들을 길러도 괜찮은가? 우리의 질문은 아직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아동 권리는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그래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어 보이는 아동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들어야 하는 수고는 왜 필요한 것일까? 해결도 쉽지 않고, 자리를 마련해주면 엉뚱한 소리나 할 것 같은데 굳이 이런 일일 필요한 것일까? 물론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으로 우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내내 외면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영유아와 같은 더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들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들도 좋고 싫음과 공포와 두려움은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동의 권리 보장과 참여의 실질적 진일보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아동 당사자들의 의사가 존중되는 공론이 마련되길 바란다. 비단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침해받은 권리의 주체로서 아동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사회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