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없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
중앙사회복지관 최은주
케인스주의VS신자유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은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경제 호황기 동안 '자유세계'에서는 소득 격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30년 동안 빈부 격차가 줄어들고, 사회복지 법률이 속속 제정됐다. 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도 강화됐다. 반면 그 같은 조처로 인해 기업 경영자나 중역, 주주는 예전과 같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거나 특권을 누리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1965년대 말 불황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이중의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케인스 주의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14~17쪽)>
<티나란 대처리즘의 결정체인 이른바 '대안은 없다' THERE IS NO ALTERNATIVE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다. 그것은 소수에 불과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설파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 무기였다. 신흥 기득 세력은 '대안은 없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모든 정치 게임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최후통첩으로 변질시켰다. 숙의 과정도, 민주적 의견 교류도 모두 무대에서 퇴장했다. 자유주의 세력은 "우리에게 표를 던지지 않으면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독히 단선적이고 독단적인 유일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22쪽)>
<이미 과거에도 신의 이름으로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시장이라는 신,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새로운 신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가 과거 완전무결했던 카톨릭 교리를 대신하고 있다. ‘대안은 없다’라는 논리 자체가 사전에 모든 논쟁과 반론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고, 다른 세계, 다른 해법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은 송두리째 제한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만을 주입하며 우리의 정신을 획일화하는 탓이다.(25쪽, 185쪽)>
신자유주의의 승리
먼저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들은 민영화와 공공부문의 축소, 세금감면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보여줬다. 이를 통해 혜택을 받는 이들은 일반 시민이 아닌 은행가들이었다. 또한 탈규제 정책으로 조세천국, 자금 세탁의 온상으로 만들어놓았다.
<"돈, 그것도 남의 돈을 판돈 삼아 전혀 힘도 들이지 않고, 부나 고용 창출에도 기여하는 바 없이 쉽게 너무도 쉽게 그토록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자본주의"가 생겨났다. 바로 금융자본주의다.(136쪽)>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자들은 2000년대 말 세계금융시장의 위기가 찾아오자, '국가'에 구조를 요청하게 되고 국가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적자금(국민의 세금)을 은행에 쏟아 부었다.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해법은 너무도 간단했다 '금융'자본주의만 개혁하면 됐다. 자본주의까지 손 댈 필요는 전혀 없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으므로...
‘영광의 30년’이 끝났을 때는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사회보장 축소, 임금 삭감 등을 요청하며 국가의 개입 축소를 외치다가 금융위기가 오자 국가 개입 확대를 다시 요청하며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자해달라고 했다. 자신들의 재산과 부가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 때문이 아닐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속에 담긴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맞는 것일까? 규제와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실은 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한 눈속임은 아닐까? 한마디로 오로지 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반쪽짜리 자유는 아닐까?(185쪽)>
대체 99%가 1%앞에 이토록 무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누가 위기를 걱정하겠는가? 언론과 친분이 두터운 우리 저명한 교수님들께서 은행의 자문 위원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강연이나 방송을 통해 자유주의 복음을 전파하며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열성적인 신도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 그런 그들이 어찌 감히 현 체제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소비자가 신용 대출을 받아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은행(그리고 은행 경영자)의 소득이 더욱 증가하는 마당에.(136쪽)>
우리나라의 경우도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기업들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느라 적자를 감수하지만, 이를 비효율이자 국고 낭비라고 다그치며 민영화 말고 대안이 있느냐고 한다. 밀양과 청도에서 송전탑을 막고자 싸우는 어르신들에게도, 전기를 써야 하는데 핵 발전 이외의 대안이 있느냐고 한다. 자유무역 확대해서 스마트폰 팔아야 농민도 먹여 살리는데, 우리 농업 자체에 대안이 있느냐고 한다. 새만금 사업은 이제까지 퍼부은 돈이 얼마인데 대안이 있느냐고 했다. 말도 안 되는 4대강 사업 역시 이명박은 그거라도 해서 경제성장 해야지 대안이 있느냐고 했으며, 다수의 국민들은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대안이 있느냐며 묵인해주었다.(프레시안, 자본주의는 무적의 체제? "대안은 있다!", 2013.08.09)>
게다가 우리나라는 좌우의 대립으로 분단된 경험이 있다. 국가를 비난하거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면 "그래서 뭐? 북한처럼 공산주의가 좋다는 말인가?"라고 오인받기 십상이다.
대안은 없다와 흑백논리는 일맥상통한다. 어떤 한 시스템이 잘못되면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단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라고 물음에 대해 완전히 무시해버리거나 자본주의 아니면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티나에 대해 알고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아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피곤하다. 그러니 막연한 의구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아니면 공산주의밖에 없는가? 신자유주의만이 살길인가?
저자가 말하는 ‘시민들이 평소 갖고 있던 막연한 의구심을 구체적인 관념이나 말로 표현하도록 돕고, 다른 대안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 복지마중물은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에서 지원하는 독서토론모임입니다.